재즈에세이(9) 명인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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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소폰 연주자 스탄 게츠(Stan Getz)는 명인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재즈의 전설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은 “누구라도 그처럼 연주할 수 있다면 다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의례적인 칭찬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콜트레인이 빈 말로 그렇게 말한 것 같지는 않다.
스탄 게츠를 듣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유려함’을 말한다. 그가 남긴 걸작 앨범중에 <Hamp & Getz>가 있다. 비브라폰 주자 라이오넬 햄프턴(Lionel Hampton)과 함께 한 작품인데, 여기서 게츠가 뿜어내는 유연함은 찰랑거리는 호수를 한 마리 백조가 ‘티끌만한 저항’도 없이 맘대로 유영하는 그림을 연상시킨다. 음과 음이 찰진 가락으로 연결되어 감상자에게 음악 전체가 마치 한 마리 긴 뱀인 것 같은 착각까지 안긴다.
천품과 노력? 심수상응(心手相應) 경지가 그 해답
이 앨범을 들을 때마다 명인(名人)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명인은 도대체 어디서 출현한 것일까? 흔히 제대로 된 재즈연주는 타고난 천품에다 초인적인 노력이 결합돼야만 달성할 수 있는 경지로 알려져 있다. 거장들이 남긴 앨범을 듣다보면 과연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천품과 노력이란 두 가지 조건이 단순히 결합하는 것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을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천품과 노력이 필수조건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명인은 이 양 변을 뛰어넘는 제 3의 공간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획득할 수 없는 이름이다.
수레바퀴 수리 장인인 윤편(輪扁)은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는 제나라 환공에게 책에 쓰인 ‘성인의 말씀’이란 옛 사람이 남긴 찌꺼기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방약무인한 이 말에 발끈한 환공이 그렇게 판단하는 합당한 이유를 대지 못하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하자 윤편은 이렇게 답한다. “저는 수십 년 동안 수레바퀴를 고치면서 으뜸 요령을 알게 됐습니다. 그것은 느슨하지도 않게 빡빡하지도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음으로 느낄 뿐 입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옛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심중에 있는 미묘함을 전하지 못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장자(莊子)>에 나오는 이야기다.
많은 재즈인들은 연주란 ‘손으로 만들어내는 조화(造化)’라고 한다. 그렇다. 명인은 천품과 노력을 기초로 적어도 마음(느낌)이 손(발과 입도 포함하는)과 긴밀히 호응하는 ‘심수상응(心手相應)’의 경지에 이르러야만 한다.
피아니스트 오스카 피터슨(Oscar Peterson)은 평자들로부터 “오스카의 연주는 가히 ‘Petersonism’이란 이름으로 불릴만하다”는 칭찬을 받는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자. “불똥이 튀기는 것처럼 빠른 패시지, 숨도 못 쉴 정도의 압도적인 공세, 뒤로 죽 잡아당겨 공간을 넓힌 슬로 발라드!” 누가 이를 심수상응이 발현된 경지라고 인정하지 않겠는가?
코펜하겐에 울려퍼진 황혼의 피아노
명인은 명인을 알아본다고 했다. 스탄 게츠는 죽기 몇 달 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생애 마지막 공연을 펼친다. 반주는 피아노 1대. 피아니스트는 케니 배런(Kenny Barron)이다. 색소폰과 피아노 이중주는 그리 흔한 편성이 아니어서, 처음 듣는 사람은 다소 이질감을 느낄법도 하다. 처음 이 앨범을 구입했을 때가 생각난다. 마지막 공연이라? 음!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군! 그런데 늙은 게츠가 연주를 하면 얼마나 잘하겠어? 그냥 기념으로 간직해볼까!
그런데 연주를 두 번 세 번 들으면서 큰 충격에 빠졌다. 색소폰도 색소폰이지만 노쇠한 명인을 어루만지는 케니 배런의 피아노는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울림이었다. 동서남북을 종횡무진하면서 황혼에 선 거인을 뒷받침하는 게 아! 왜 게츠가 마지막 파트너로 케니 배런을 선택했는지 짐작이 갔다.
멜로디컬하면서도 힘있는 타건. 색소폰이 쉴 때면 다채롭게 펼쳐지는 독주. 느린 색소폰 음색을 감싸안는 부드러움. 지금은 머리가 띵할 때면 찾아듣는 필청음반 1호다.
일렉트릭 재즈베이스는 자코 패스토리우스가 선구자지만, 70년대 자코 연주가 널리 알려지면서 수많은 추종자가 줄을 이었다. 오리지널 아프리카(카메룬) 출신 음악인 리처드 보나(Richard Bona)도 그중 한 사람이다.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이 검은 사람은 베이스 기타 테크닉에 관한한 궁극적 존재다.
자코의 연주 스타일을 더 세밀하게, 더 깊이있게, 더 빠르게 확장시킨 이 친구는 “인간의 손놀림이 저런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니?”하는 감탄사를 연신 토하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재즈적 필링 또한 다채롭다. 게다가 아프리칸 보이스와 리듬까지 신들린 듯 구사한다.
리처드 보나를 보면 노력만으론 절대 그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 없음을 직감한다. 물론 아프리카 산이란 출신성분도 그가 이룬 성취를 다 설명하진 못한다. 역시 심수상응이란, 차원높은 경지가 존재하는 걸까?
젊은 천재는 음악적 무공(武功) 덕분?
트럼페터 클리포드 브라운(Clifford Brown)은 스물여섯에 죽었다. 음악인들은 그의 죽음을 ‘재즈에 내린 재앙’으로 표현했다. 그만큰 상실감이 컸다는 이야기다. 본격적인 활동기간은 4년 남짓. 그는 이 기간동안 재즈 트럼펫이 구사할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을 한 치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서정성, 선명한 사운드. 전염성 강한 열정. 그래서 후배 트럼페터들이 최종 목표로 삼는 이도 그다. 그가 스트링 사운드와 함께한 ‘스타더스트(Stardust)’를 들어보면 솔직히 다른 사람이나, 다른 악기가 이 곡을 연주하는 건 시시하게 느껴진다.
대다수 명인이 떡잎부터 남달랐지만, 클리포드 브라운은 특히 더하다. 그는 나이 스물 전에 테크닉을 넘어선 경지에 올랐다. 그리고 스물여섯으로 마감한 짧은 일생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된다.
타고난 천품이 있었다고 치자! 그리고 비상한 노력이 따랐다고 치자! 그렇지만 심수상응을 이루기 위해선 윤편이 제환공에게 말한 것처럼 오랜 연단(鍊鍛)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클리포드 브라운은? 조숙한 명인은 심수상응만으론 설명이 안된다.
엉뚱한 상상을 해보자면 타고난 천품을 바탕으로 수련에 임하던 중 임독(任督) 양 맥이 터지는 바람에 음악적 감성이 ‘천의무봉’에 오른 건 아닐까? 희극왕 주성치는 일찍이 영화 ‘쿵푸허슬’에서 임독 양맥이 타통될 경우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 지를 잘 보여준 바 있다. 악당에게 제대로 얻어맞는 바람에 임독 양맥이 뚫린 주인공은 어릴 적 배웠던 절세신공, ‘여래신장(如來神掌)’을 깃털처럼 가볍게 구사한다. 결과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이다.